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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16:00

안면도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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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에 있는 안면도는 면적 113.5 km²로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 째로 큰 섬이다. 1968년 연육교가 놓인 이후로 거의 육지처럼 변했지만 엄연히 육지와 떨어진 '섬'이다.

 

[남면과 안면도를 잇는 안면대교. 구 안면대교에서 신 안면대교 쪽을 바라본 장면. 사진 앞쪽이 천수만이다]

 

  그런데, 안면도가 옛날에는 섬이 아닌 반도의 일부였다고 한다. 지금 안면대교가 있는 그 자리가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운하라는 것이다. 역사적 근거가 약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선 인조 때 굴착되었다는 매우 구체적인 주장이 일반화되어 있다. 과연 안면도는 섬이었을까, 섬이 아니었을까?

 

▣ 안면도는 원래부터 섬이었다는 주장

 

  안면도가 원래부터 섬이었다는 주장의 핵심은 우선 조선시대 당시 조차가 큰 서해바다의 특성과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운하를 굴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고자 시도되었던 굴포운하가 실패했던 것에 비춰보면 이곳 역시 굴착이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굴포운하: 5백 여 년의 꿈 http://blog.daum.net/lovegeo/6781128). 굴포운하가 실패했던 원인은 이곳에서도 똑같이 작용했을 것이다. 조차가 무려 4.5m에 이르는 천수만, 낮은 기술 수준, 그리고 암반층. 더욱이 현재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해협의 길이가 무려 5km에 육박한다(물론 실제 굴착 구간의 길이는 이보다는 짧았을 것이다). 굴포운하의 굴착 구간이 2km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훨씬 어려운 조건이다.

 원래 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 가운데 또 하나는 해협의 넓이가 지나치게 넓다는 점이다. 안면도와 남면 사이의 해협은 넓이가 최소 150m를 넘는다. 연육교가 있는 곳이 가장 좁은데 그 넓이가 약 150m이다. 조운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운하를 만들었다면 이 정도로 넓은 운하는 필요하지 않았다. 굴포운하에 비춰보면 폭 10~20m 정도면 당시의 세곡선이 통과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운하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굴포운하는 운항 거리를 단축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안면운하는 투여하는 노력에 비해 그 실효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옛 기록에 의하면 조운선의 항로 중에서 위험했던 구간으로는 안면도 앞바다가 아니라 안흥량이 자주 언급되었다.

  이상의 조건들을 고려해 보면 안면도는 원래부터 섬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반도였는데 자연적 침식작용으로 반도의 좁은 부분이 끊어져서 섬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 조선 인조 때 반도를 잘라서 섬이 되었다

 

  하지만 안면도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이라는 설이 중론이다. 구체적으로 조선 인조 16년(1638)에 안면도 북쪽인 지금의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의 좁은 부분을 파서 운하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옛날의 기록이나 지도를 보면 지금의 태안군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해협에 남굴포(南掘浦, 김정호, 「대동지지」), 굴포(掘浦, 「대동여지도」), 굴항(掘項,「1872지방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파다(掘)'라는 의미의 지명들인데 이는 이곳이 운하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판목'이라는 지명도 전하는데 이는 掘項의 순 우리말 표현이다. 「호서읍지」(1871)의 '태안군'편에는 태안의 향리 방경령(房景岺)의 제안으로 운하가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안면도 굴착 시기로 알려진 인조 이후로 만들어진 자료들이다.

 

 

[비변사인방안지도(18세기 중엽). 남면반도 끝에 '掘浦'가 표기되어 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안면도가 섬이 아닌 상태로 그려진 지도이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지도에서 안면도가 반도로 표현된 지도들이 발견된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도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충분한 사례를 확보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지만 이 시기의 지도들은 공통적으로 안면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국지도

 

  대표적인 지도는 16세기 중엽에 제작된 「동국지도」 이다. 이 지도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중종25)의 附圖로 제작된 「東覽圖」와 유사한 형식으로 각 도별도를 중심으로 제작된 목판본 지도책이다. 태안반도 남쪽이 안면도 대신 '요아량(要兒梁)'이라고 표시된 긴 반도로 묘사되어 있다.

 

 

[동국지도(16세기 중엽). 안면도가 반도(요아량)로 표시되어 있다]

 

  * 정상기의「동국지도」

 

  안면도 운하가 굴착된 시기로 알려진 인조(1623∼1649) 재위 시기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는 정상기(1678~1752)의「동국지도」가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워낙 뛰어난 지도였기 때문에 많은 필사본들이 전한다. 필사본들은 원본의 내용을 수정한 것도 있고 그대로 반영한 것도 있는데 안면도 표현 역시 두 가지가 모두 전한다. 그런데 인조 연간에 안면도가 굴착되었다면 정상기의 동국지도에는 안면도가 섬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정상기가 지도 제작에 매진한 시기가 대략 1700년대 초반이라고 보면 안면도가 굴착된 후 거의 백 여 년이 지난 때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동국지도」모사본들은 안면도를 표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본 「동국지도」에는 안면도가 표현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운하 굴착 시기가 인조 이후인지, 아니면 정상기의 오류인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輿地圖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모사한 지도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지만 원본을 수정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안면도가 원산도 앞까지 이어지는 긴 반도로 묘사되어 있다.

 

 

 

[여지도(18세기 후반)]

 

  *「八道地圖」

 

  「팔도지도」역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모사한  지도인데 특이하게 필사자로 ‘이재(頤齋)’라는 호가 적혀 있다. 이재는 黃胤錫(1729-1791)이라는 사람의 호이다. 필사연도는 崇禎三庚戌’(1790년, 정조 14)이다. 정상기 집안에서 내려온 지도를 필사했다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과 거의 동일할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이다. 이 지도도 역시 안면도가 반도로 묘사되어 있는데 반도를 '요아량(要兒梁)'으로 표시한 16세기「동국지도」와는 달리 '안면'으로 표시하고 있다.

 

 

[팔도지도(1790)]

 

 *「경기도부충청도지도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경기도부충청도지도」역시 안면도가 남면과 이어진 곶(반도)로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우리나라 지도의 표본이었으므로 이 시기까지 원본을 그대로 모사한 지도들이 많았다. 이 지도 역시 그런 성격의 지도로 정상기의「동국지도」에 안면도가 串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부충청도지도(18세기 중엽). 안면도가 긴 반도로 표시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들은 반도였던 안면도가 굴착 공사로 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굴포운하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굴포운하가 오백여년 실패를 거듭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면도운하는 '조선 인조 때'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다.

  첫 번째 이유는 굴착 구간이 훨씬 짧았기 때문이다. 현재 해협의 길이는 백사장항에서 천수만 연안의 창기리 우포나루 앞까지 대략 5km에 달한다. 하지만 많은 지역이 갯벌이나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땅이어서 굴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굴착 당시 암석 구간의 길이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현재 안면도에서 천수만과 서해안 사이에 암석 구간의 넓이가 가장 짧은 곳은 300m가 채 되지 않는 곳도 있다. 과거에 운하 굴착을 시도했다면 당연히 굴착 구간이 짧은 곳을 선택했을 것이므로 굴포운하에 비해 암반 굴착 구간이 짧았던 것이 분명하다. 

 

[안면도의 지질구조(창기리 일대). 충적층(Qa)과 충적층 사이의 암석 구간(연두색)의 거리가 260m이다]

 

[안면도 음영기복도 *자료: 안면도·원산도·황도·외연도·호도도폭 지질조사보고서(한국지질자원연구원, 2015)]

 

  두번째는 지질구조가 다르다. 안면도의 기반암은 거의 대부분이 고생대 퇴적층으로 시원생대에 형성된 고변성의 서산층군을 피복한 저변성의 퇴적층이다. 변성작용을 많이 받지 않은 퇴적암은 마그마가 지하에서 서서히 굳어서 만들어진 화강암에 비해 강도가 훨씬 약하다. 또한 안면도에는 다양한 방향으로 단층선이 발달하고 있다. 단층선이 발달할수록 풍화가 잘 이루어지며 암석의 강도도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가장 두드러진 방향은 동북동-서남서 방향인데 안면도 운하는 바로 이 방향과 일치한다. 따라서 안면도 운하는 굴포운하와 비교하여 훨씬 공사가 쉬운 조건을 갖고 있었으므로 큰 어려움 없이 운하를 완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암석 간 압축 강도 비교. *김교원·김수정, 2006, 한반도의 암종별 공학적 특성의 상관성 분석, 공학지질 16(1), 대한지질공학회]

 

육지에서 섬으로, 다시 육지로

 

  '섬'은 '고립'을 상징한다. 그래서 육지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상상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그곳에 살고있는 주민들은 생활에 불편함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육지에 인접한 섬이 많아서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연육교가 많이 만들어져 왔다. 심지어는 고군산군도처럼 뱃길로 한 시간도 넘는 섬을 연결하기도 했다. 고립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으로 실제 다리가 만들어지면 섬의 성격은 급격하게 바뀐다. 전통적 경관이 사라지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상업적 토지 이용이 증가하면서 주민의 경제 활동 기회가 다양해진다.

  그런데 안면도는 굳이 육지를 잘라서 섬을 만들었다. 인간의 행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과거 어느 시기에는 육지를 섬으로 만드는 것이 더 이익이 되는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립성을 자초하면서도 얻을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니…

  안면도에서는 그 잇점이 바로 조운이었다.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직접 연결하고자 했던 굴포운하 굴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대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안면도 굴착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운항 거리가 오히려 멀어지는 항로라서 왜 이런 공사를 했을까 의구심이 생긴다. 하지만 배가 작고 바닥이 평평한 형태였기 때문에 파도가 강한 외해(外海)에는 매우 취약했던 것이 전통시대 우리나라의 배였다. 수심이 낮은 하천까지 연결해야 했으므로 바닥이 평평한 배가 불가피했다. 안면도의 서쪽은 외해에 노출되어 있어서 파도가 강하다. 반면에 안면도의 서쪽, 즉 천수만은 안면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파도가 훨씬 약하다. 이러한 해안의 특징은 지형에 잘 반영이 된다. 즉, 안면도의 서해안은 주로 모래해안이나 암석해안이 발달하는 반면, 천수만쪽은 넓은 갯벌이 발달하고 있다.

  전제 왕권 시대에 나라의 주인은 왕이었다. 왕권을 유지하는 것과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양립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나라의 모습이었겠지만 이런 태평성대는 거의 없었다. 주민들의 편의와 국가 권력 유지가 상충한다면 당연히 결정은 국가 정책 중심으로 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과거에는 원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섬이 되거나 말거나 큰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좁고 긴 반도의 끝이었으므로 오랫동안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차피 안면도 남부에 사는 주민들은 걸어서 태안을 가는 것보다는 배를 이용해서 홍주의 광천항으로 가는 것이 더 편리했을테니까. 실제로 조선시대 안면도는 태안현, 홍주목, 서산현(월경지)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북서부는 태안, 북동부는 홍주, 남부는 서산의 영역에 속했다.「대동여지도」(1861)]

 

 

  1968년 연육교가 놓이면서 마침내 안면도는 태안읍의 생활권으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섬의 남쪽 주민들은 배를 타고 홍성군의 광천항을 왕래하며 생필품을 조달하였다. 1968년 이후 오랫동안 왕복 2차선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었다가 2002년 세계 꽃 박람회가 개최되면서 왕복 4차선 다리 하나가 더 놓였다. 이제 안면도는 말이 섬이지 육지와 다름이 없는 땅이 되었다. 현재 건설 공사가 진행중인 연육교 및 해저터널로 보령시와 연결되면 안면도는 더욱 육지와 다름없는 땅으로 변할 것이다. 오지를 벗어나서 태안과 보령, 양쪽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안면도가 사람이라면 참 화가 나겠다. 일부러 땅을 잘라서 섬을 만들었을 때는 언제고 이제 다시 다리를 놓아 육지와 연결을 하겠다니…  그렇다면 안면도를 달래야 할까? '땅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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